본문 바로가기
personal/book, movie

흑인이 백인에게 저항하지 못했던 이유?

by walk around 2009. 10. 2.


프란츠 파농의 <검은피부 하얀가면>을 보면 흑인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가 나옵니다. 아들은 "나는 백인에게 총을 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백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백인을 응징할 수 없다는 아들의 반응에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상대는 백인"이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백인이 흑인을 돼지잡듯 도살해도?"라는 말에 아들은 "그래도 저들은 백인"이라고 말합니다.

흑인들은 백인에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인은 백인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백인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 흑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파농은 흑인 아들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비존재의 감정'으로 설명했습니다. 흑인 아들은 이 세상이 '백인들 때문에 굴러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흑인인 자신이 감히 백인을 응징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존재의 감정은 식민지에서 흔히 발생하기도 합니다. 지배국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현실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피지배 계층 또는 2등 국민으로 인정하게 되는 사람들이 비존재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링크> 식민지 출신이 분석한 식민근성

백인에게 흑인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
비존재의 감정이 이런 극단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지배 vs. 피지배인, 유명인 vs. 비유명인 사이에도 살짝살짝 나타난다.

비존재의 감정은 인종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민족 같은 국가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혈세를 쪽쪽 팔아 먹으면서도 국가를 위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그들의 검정 승용차 기름값을 대는 서민들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 순간 평범한 시민들은 비존재의 감정에 휩싸입니다.

자신들이 휴대폰 벨소리를 다운받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바람에 부자가 된 연예인이 옆을 지나가면 황송해 합니다.

누군가 "저 도움 안되는 정치인과 거만한 연예인 앞에 당당하라"라고 말한다면, 비존재의 감정에 사로잡힌 평범한 시민은 "내가 감히 어떻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들에게 반기를 든단 말인가? 이말은
나는 그들보다 한 수 아래 계층 사람이며 그들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인식은 사회 발전을 더디게 합니다. 흑인들이 백인의 지배를 마냥 인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없는 것으로 했다면 미국에 흑인 대통령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서민도 일반 시민도 스스로 사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정치인에게 주눅들지 말고, 연예인 앞에 작아지 않을때 우리 사회가 발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