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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Worldcup

첫 실점하는 순간, 아르헨전은 끝났다

by walk around 2010. 6. 17.

개인적으로는 3-1 정도로 한국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전반 17분 한국의 자책골에서 끝난 것 같습니다. 팬들도 선수들도 자책골은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었습니다.

그간 축구에 미쳐 수많은 경기를 보면서, '축구는 분위기'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경기 초반에 어이없는 실점을 하는 팀은 아무리 약체와 경기라도 뒤집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얀 백지 위에 "자! 이제부터 명작을 그려보자"는 심정으로 먹을 갈고 붓을 들었는데, 실수로 한 가운데 먹물을 똑! 흘려서 시커먼 점이 생기면 기분을 완전히 잡치게 됩니다. 머리로는 "이제부터 조심하면서 그림을 잘 그려보자"는 생각을 하지만, 무의식에 "이번엔 글렀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짜증이 나고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이번 경기에서 한국팀은 첫실점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이때 일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선수들 스스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실수한 선수를 다독이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박주영의 실수 후에 기성용이 잠시 위로를 했을 뿐 대부분 그냥 말없이 하프라인으로 뛰는 것 같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시점에서 박주영 선수는 정신적 공황에 빠졌고, 적어도 후반 시작 시점에는 교체를 하는 게 분위기 쇄신상 나아보였습니다. (물론 박주영 선수가 그 패닉을 이 경기에서 극복을 못하면 슬럼프가 오래 갈수도 있긴 합니다.)

그렇게 정신적인 밸러스가 깨지면 선수들은 서로 책망하게 됩니다. 짜증이 나면서 자기 플레이를 못하고, 곧 육체적인 활동성 저하로 이어집니다.

오랫동안 정말 잘 하기 위해서 철저하고 힘겹게 준비한 것에 비례해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면 다리가 완전히 풀리면서 게임 분위기는 끝나게 됩니다.

지난 5월 1일 제가 지지하는 부천FC가 삼척원정을 떠났습니다. 경기가 열린 도계공설운동장은 다소 고지대였습니다. 게다가 첫골을 골키퍼와 수비진의 실수로 허용을 했습니다. 삼척이 강팀이었지만, 부천이 그렇게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는데, 경기는 0-3 완패였습니다. 어이없게 무너진 분위기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화이팅을 외치지만 선수들은 이미 다리가 풀렸습니다.

5월 29일 천안FC 원정경기에서도 첫골을 역시 골키퍼와 수비진의 실수로 허용한 후, 한수 아래로 평가되던 천안을 상대로 좀 처럼 해법을 못찾고 선수단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가 결국 0-1 충격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경기 중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응원, 선수단 내부의 파이팅, 운 등의 요인이 필요할 텐데, 오늘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는 아르헨티나 홈 분위기였고 한국 응원단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선수단의 파이팅도 찾아 보기 어려웠습니다. 염기훈 선수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는 등 운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어리버리하게 3번째 골을 허용하면서 이후에는 만회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을 보내는 듯한 플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많은 준비와 노력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공황과 공포의 극복' 이것은 강팀의 조건입니다. 체력뿐 아니라 강한 정신력이 아쉬웠던 경기였습니다.

아래 경기는 2008년 6월 유로2008 터키와 체코의 경기입니다. 밀리던 터키는 '전쟁의 화신' 같은 플레이와 정신력으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패닉을 극복하는 이런 모습은 드물기 때문에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드문 경험을 우리는 오늘 하지는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