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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SK21

2억5천 부천FC, 100억 부천SK 육박하는 지자체 홍보효과 [부천시는 부천FC를 다시 봐야 한다①] 경기도 부천시에는 부천FC 1995라는 3부리그, 즉 챌린저스리그 축구팀이 있습니다. 이 축구단은 부천시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부천FC 구단과 팬들은 연고지역 자치단체인 부천시에 구단에 대한 지원을 늘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요구는 정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축구팬들의 이기적인 부탁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부천FC는 불과 2억 5천만원의 1년 예산으로 운영되면서 연고지역인 부천시를 수억원의 가치만큼 홍보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네요. "지자체를 홍보해서 뭐하지?" 오.. 예리하면서 일리있는 질문입니다. 시청마다 지자체를 홍보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필요하니까 있는 것이겠죠. 수원, 부천, 성남, 고양, 포천, 의정부, 남양주, 양주, 이천,.. 2011. 12. 22.
부천SK 연고지이전 후 준비한 성명서 및 축구팬에 대한 제안 부천SK의 제주 연고이전 발표(2006.2.2) 이후, 연고이전 반대 비대위·붉은악마·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 공동 기자회견(2.8), 당시 붉은악마 의장이었던 오중권씨와 헤르메스 정해춘 등의 부천시청 방문(2.10), 대한축구협회 및 SK본사 앞에서의 연고이전 반대 시위(2.14), 손학규 도지사·김문수 의원 만남(2.19) 등 팬들의 숨가쁜 행보는 비대위의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부천서포터 창단 멤버였던 이희천님이 최종적으로 정리한 성명서와 행동강령을 지금까지도 하드에 저장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글을 적어내려갈 때의 배신감과 상실감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지금은 물론 아래와 같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상황이었고 지금도 아픔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정리하.. 2011. 10. 15.
팀을 잃은 부천서포터, 창단준비위 구성하고 지역 명사들 만나다 부천SK의 제주 연고이전 발표(2006.2.2), 연고이전 반대 비대위·붉은악마·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 공동 기자회견(2.8), 당시 붉은악마 의장이었던 오중권씨와 헤르메스 정해춘 등의 부천시청 방문(2.10), 대한축구협회 및 SK본사 앞에서의 연고이전 반대 시위(2.14)가 이뤄지던 시점에서 부천서포터즈 헤르메스는 긴급하게 창단 준비위를 구성했다. 연고이전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을 때 창단 작업이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팬들의 중론이었다. 무엇보다 부천 서포터즈들은 지역에 축구단이 없다는 것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보였고, 무엇이되었든 어서 만들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관련글 : 부천SK 연고 이전 후, 부천시청 찾아간 서포터즈 준비위는 2006년 2월 19일에는 당시 부천 소사구 국회의원이었.. 2011. 10. 14.
부천SK 연고 이전 후, 부천시청 찾아간 서포터즈 지난 이야기 : "反연고이전 시위를 국가대표 경기 때 하면 어떨까?"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앙골라전 상황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시기적으로 부천FC 서포터즈가 각계 인사를 만나 의견을 교환한 이야기를 먼저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시간적으로 보면 2월 14일 진행된 대한축구협회 및 SK본사 앞 시위 보다 앞선다. 2006년 2월 10일. SK구단 연고이전의 충격이 진동하던 시점이었다. 부천서포터 대표단은 당시 홍건표 부천시장을 면담할 수 있었다. 면담의 상황은 의 2009년 보도로 대체한다. "3년 전, 지난 2006년 2월 3일 부천을 연고지로 한 sk축구단이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연고지를 이전하자 붉은악마와 부천 축구 서포터즈 '부천 헤르메스' 회원 등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2006년 2월 10.. 2011. 10. 13.
"反연고이전 시위를 국가대표 경기 때 하면 어떨까?" 2006년 2월 14일 대한축구협회 앞에서서 연고이전 반대 시위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연고이전 반대 운동은 일단 사라졌다. 대부분의 팬들은 직장인 또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프라인 활동이 꾸준하게 이어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특히 부천SK 연고지이전을 계기로 재결성된 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전에도 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이 존재했지만, 각 단체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흐지부지 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연고이전'이라는 서포터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면서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 카페의 게시판에서는 각종 시위 아이디어와 연고이전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대표는 전북현대 서포터즈클럽 대표였다. 당시에는 부산, 울산,.. 2011. 10. 12.
부천FC, 부천SK, 포항 스틸야드, 제주유나이티드 … 축구를 보면서, 또 부천SK라는 팀을 좋아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지방원정을 떠났던 곳이 포항이었다. 벌써 15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다. 그때 원정을 함께 떠난 부천SK의 서포터 헤르메스 회원은 나까지 모두 5명. 그나마 늦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서 마구 달려서 S석 2층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느낌은 뭐랄까. 가슴이 마구 뛰는 흥분상태? 선수들에게 비록 늦었으나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했다. "오! 필승코리아"의 원곡인 "오! 부천FC"를 부르고, 지금에 비해 아주 약하기 짝이 없는 홍염을 터뜨렸다. 부천SK의 목동구장 시절. 서포터즈클럽 헤르메스 대한민국 서포터 최초의 자체 제작 홍염, 최초의 연막, 최초의 게이트기, 최초의 통천 도입 "경기 안보인다!"는 포항 관중의 원성이 들렸지만 응원을 .. 2011. 10. 4.
잠시 되돌아 본 부천SK의 부천 정착기 그럼 잠시 부천SK라는 팀과 부천의 인연에 대해서 살펴보자. 1995년부터 유공코끼리를 응원하던 팬들은 부천유공을 거쳐 1997년 10월 부천유공 SK FC로 바뀌는 듯 하다가 부천SK로 이름이 바뀌는 것을 목격한다. 그와중에 팀의 지역연고도 바뀌었고, 팀의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응원단은 조용히 변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서포터는 아직 지역연고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고, 서울에 3개의 팀이 몰려 있는 등 연고정책이 다소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1997년 당시 부천유공은 목동종합운동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홈구장인 동대문에서 빠질 때도 저항이 더 없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천안으로 떠난 일화천마보다는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니까. 부천유공 서포터 헤르메스의 초창기 모.. 2011. 6. 9.
시위대, 축구협회에서 자연스럽게 부천SK 모기업으로 이동 2006년 부천SK의 연고지이전 상황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2003년말부터 2004년초에 있었던 부천SK 매각·시민구단 전환 해프닝을 다뤘다. 이전 이야기 : 부천 STORY 다시 2006년 부천SK의 연고지이전 상황으로 돌아와서... 2006년 2월 14일 대한축구협회 앞에서 연고이전 반대 시위를 했던 축구팬들은 종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누가 인솔하지도 않았는데, 발길은 SK주식회사 본사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향하는 동안 팬들은 각 팀들의 응원가를 불렀다. SK를 비난하는 응원가를 급조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중에 "그따위로 축구하려면~"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향후 연고이전 반대 시위의 주제가 역할을 했다. SK주식회사 본사 앞에 모인 팬들은 돌아가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부천SK의 팬들은 눈물을 .. 2011. 2. 1.
연고이전 이전에 구단매각, 시민구단 전환 논란 이전 이야기 : 부천 STORY 계속해서 2003년말부터 2004년 초까지 부천SK 팬을 불안하게 했던 구단 매각과 시민구단 관련 이야기이다. 당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팬들은 아예 '부천시민구단창단시민모임'를 만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2003년 12월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강OO 부천 단장은 12월 30일 부천시의 주도로 시민 구단을 창단할 경우 비용 부담 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구단이 보유하고 있는 100억원 상당의 자산인 K리그 가입권( 40억원)과 선수단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시에 전달했다고 한다. 강 단장은 "중국의 다롄 스더와 매각 협상이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그동안 구단을 성원해온 부천 시민들에게 연고지를 존속시키도록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 순 리라고 판단해 시의 .. 2011. 2. 1.
부천SK, 연고이전 하기 전에도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이전 이야기 : 부천 STORY 기자회견, 시위... 일단 간단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행동은 다 했다. 하지만 연고이전 이라는 것이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계속 비난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게다가 축구에서의 연고이전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크게 부각될 문제도 아니었다. 물론 연고이전 문제는 우리나라에 축구문화가 정착되고, 팬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느 정도 뜻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문제로 여겨졌다. 언론의 관심도 큰 편은 아니었다. 부천서포터가 할 수 있는 것 또는 해야할 것은 이제 두 가지. 첫번째는 SK주식회사나 제주유나이티드를 비난하며 화풀이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새로운 팀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2002시즌 개막전. 부천은.. 2011. 1. 31.
연고이전 반대 거리시위(2006.2.14) 이전 이야기 : 부천 STORY 연고이전반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기자회견(2006.2.8)에 이어서 축구 서포터즈 단체들은 거리시위에 나섰다. D데이는 2월 14일. 축구장이 아닌 곳에 서포터즈들이 많이 모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리 연고이전이 축구를 망치는 행위라고 하지만, 14일 시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지는 미지수였다. 행사 당일 오후 서포터들은 신문로 대한축구협회 앞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인 서포터는 어느새 100명을 훌쩍 넘겼다. 가장 사람들이 많을 때는 약 300명에 달했다. 누구도 예상못한 숫자였다. 그날은 평일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팬도 상당수 있었다. 매우 추운 날이었다. 추운날 개인사를 제치고 시위를 나올 정도였기 때문에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한 사람들이.. 2011. 1. 28.
연고이전 반대 비대위 기자회견 - 붉은악마, 부천서포터 발표문 이전 이야기 : 부천 STORY 2006년 2월 8일 서울 대학로 붉은악마 쉼터에서의 연고이전 반대 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비대위 위원장의 성명에 이어서 당시 붉은악마 의장의 성명도 낭독이 됐다. 공교롭게도 당시 의장은 부천SK의 서포터였다. 붉은악마 쉼터에 모인 서포터들은 상당히 진지했다. 뜨거운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언제나 기세등등하고 강한 모습을 보이던 부천서포터들은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비대위의 준비는 비교적 치밀했다. 관련자료, 발표문, 회의실의 걸개까지.. 흡사 장례식장을 방불케 했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온 걸개도 상당수였다. 붉은악마 의장의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6년은 독일월드컵이 열리는 희망적인 한해 시작이었습니다. 붉은악마 역시 독일월드컵 원정을 준비하며, 어느 때 보다.. 2011.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