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축구/football itself

테헤란 징크스를 깼던 이천수를 기억합니다

by walk around 2010. 4. 4.

요즘 축구선수 이천수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중동으로 이적하려고, 어려울 때 자신을 거둬준 국내 지도자와 팀을 속였다는 이야기. 연예인과 사귀었다는 이야기. 외국에 나가서 잇따라 실패한 이야기 등 뭐 하나 우호적인 게 없습니다.

사실 그가 팬에게 실망을 준 적도 많지만, 팬에게 그리고 한국 축구에 엄청난 기쁨을 준 적도 많습니다. 어쩌면 그의 튀는 성격과 행동을 그의 주변에서 누군가 함께 하며 참된 조언을 해주지 못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지난 2004년 3월 17일 이란 테헤란에서 벌어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전. 이 경기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이천수를 쉽게 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관련기사 : 이천수 한방 '테헤란 신화' 쏘다  


당시 경기를 보기 위해 테헤란을 찾았을 때 경기장 주변에는 이란 국기를 든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이란은 안방에서는 제대로 호랑이입니다. 당시 이란 올림픽대표팀은 64년 도쿄올림픽 예선 이후 40년 동안 안방에서는 3승6무로 진 적이 없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경기가 열리는 아자디 스타디움에서는 1971년 개장 이후 단 한번도 동아시아 팀에게는 진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 대표팀도 1무2패만 당했던 경기장입니다. 


경기장 앞에서는 이란에서 처음으로 본 노점이 있었습니다. 국기와 응원도구를 팔고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아자디 스타디움입니다. 경기장이 웅장하고 삭막한 것이 처음 오는 사람이나 선수에게는 퍽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라고 해야하나.



입구를 지나자 멀리 경기장이 보입니다. 높지 않습니다. 땅을 파서 만든 모양입니다. 어찌됐든 삭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해발 1,273m의 고지대입니다. 관중은 무려 9만 명이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란은 응원도 워낙 요란합니다. 원정팀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삭막한 경기장입니다.


한국인을 본 이란 사람들은 국기를 펴들기 바쁩니다.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위협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기장 입구 전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얕은 호수를 만들어 놨습니다. 주위로 나무를 심어 놓으니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잘 생긴 이란 군인입니다. 한국 팬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과거 일본팬들이 자국 선수들을 따라 전세계를 다니며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참 부러웠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대표팀을 따라 어디든 가는 팬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발전이라는 거, 참 중요합니다. --;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이란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야 합니다. 이를 아마 히잡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경기 시작 근 2시간 전인데 일부 관중들이 벌써 들어와 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잔디로 상태는 좋아 보입니다.


비록 똑딱이지만 건너편 이란 관중을 땡겨 봤습니다. 여자는 없었습니다. --; 모두 시커먼 남자들. 이란에서는 여자들이 경기장에 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제 경기를 시작할 모양입니다. 당시 한국 올림픽 대표팀에는 이 경기의 주인공이 된 플레이메이커 이천수를 비롯해 최성국-조재진 투톱, 김치곤-조병국-박용호의 스리백, 김동진-김정우-김두현-박규선 미드필더진이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성급한 일반화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저의 '국민의례 선수 분포에 따른 승부예측'에 따르면 국민의례 때 선수들이 공간을 많이 두고 선 팀이 자신감이 넘치는 팀으로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기 역시 한국팀은 원정팀의 무덤에서도 자신감이 있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홈팀 이란이 다닥다닥 붙어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한국 응원단입니다. 한국에서 간 사람들과 교민들입니다. 이란에도 교민이 있습니다!


제가 경기에 몰입했던 모양입니다. 이란전 사진기록은 여기까지 입니다. 아무튼 이 경기에서 이천수는 전반에 골대를 맞추는 등 분전을 거듭하다 드디어 후반 15분 조재진이 페널티지역 외곽 오른쪽에서 찔러준 공을 잡아 수비수 한명을 드리블로 가볍게 제쳐내고 왼발로 한번 더 치고 들어간 뒤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슛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이 슛이 결승골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40년 동안 안방에서 한번도 직 적이 없는 이란 올림픽대표를 침몰시켰습니다. 그리고 A대표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서의 무승 징크스도 달랬습니다.

테헤란 안방 호랑이 이란 대표팀을 이천수 한방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덕분에 한국은 2연승으로 승점 6을 확보하며 A조 단독 선두로 올랐고, 결국 아테네로 갈수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이천수의 역할이 상당했습니다. 그 역시 4강 신화의 주인공 중 한명입니다. 그가 독일과 준결승에서 날린 결정적인 슛이 들어 갔으면 아마 한국 축구도, 그의 운명도 더 드라마틱 했을지 모릅니다.

그의 중동 이적은, 그리고 유럽 진출 실패는 단순히 그 혼자가 다 뒤집어 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진출을 도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의 현지 적응을 도와주워야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축구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여러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축구감옥'은 박지성이 한 이야기.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직 축구만 생각하고 경기만 하는 고행에 가까운 시간을 '축구감옥'으로 표현)

아무튼 아까운 인재입니다. 아직 몇 년은 더 지난 테헤란에서의 극적인 골과 같은 일을 더 해낼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선수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과거 한국 축구에 공헌 것을 생각해서 인신 비난이 아닌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천수 선수도 과거 영화와 학원 축구시철부터 최고의 길을 걸어왔다는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백의 종군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성인이기 때문에 어쨌든 자신의 결정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풀 것은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다시 한번 이천수가 그라운드에서 천연덕스럽게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요즘 벤쿠버 영웅들이 시상식에서나 사생활에서 톡톡 튀는 모습을 보여서 오히려 보기 좋다는 평이 많은데, 그들이 성적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메달도 못 따고 그랬다면 "철 없다"는 비난만 받았을 것입니다. 이천수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해외에서 성공했다면 그의 튀는 행동은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을 뛰어넘어 벤쿠버 영웅들과 비슷한 평을 받았을 것입니다. 매춘을 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은 웃고 넘기고, 과거 큰 기쁨을 준 우리 선수를 매정하게 대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