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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The Fan

국가대표 경기에 열광하지 않는 축구팬이 있다고?

by walk around 2010. 6. 15.

"1970년대 초, 나는 잉글랜드인 대열에 동참했다."

축구 에세이 <피버 피치(Fever Pitch)>의 48페이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축구책에서 "잉글랜드인 대열에 동참했다"는 표현은 "축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 같은데, 그 다음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전 잉글랜드인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이들과 나란히, 나 역시 잉글랜드를 미워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농담반 진담반인 것 같은데, 아무튼 국가대표팀에 대해서 다소 애매한 태도를 갖고 있는 축구팬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토튼햄, 리즈,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 선수들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볼 때면 온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고, 우리들 대다수가 그러했듯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경기와 나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국가대표팀에 대한 무덤덤한 태도는 클럽 서포터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피버 피치>의 저자 닉 혼비는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차라리 웨일스 사람이나 스코틀랜드 사람, 아니면 네덜란드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았다. 다른 나라 축구팬들도 그럴까? 예전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기 선수들이 외국에서 망신을 당하고 돌아오자 공항에서 썪은 토마토를 던졌던 일이 있는데, 나로서는 그만한 관심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의 성적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클럽의 성적에 관심이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른 몇일 후 이탈리아 기자를 만났습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게 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페루자에서 쫒겨날 상황에 이르고,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으나 이탈리아 여행을 자제하라는 보도까지 나오는 와중이었습니다.

"당신도 한국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나는 삼프도리아 서포터이며 국가대표의 성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답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는 부연설명도 하더군요.

2005년 6월 1일 독일국가대표는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을 준비하며, 자국의 명문팀 바이에른 뮌헨과 평가전을 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뮌헨은 대표팀을 4-2로 대파합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대표팀 골키퍼 레만에게 조롱과 야유를 했습니다. 뭰헨 소속 올리버 칸이 최고이기 때문에 레만을 빼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대표팀 코치 비어호프는 "관중들의 편파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국가대표팀을 그런 식으로 대우해서는 안된다"며 흥분했다고 합니다.(조이뉴스24, 2005.6.2) 발단은 골키퍼이지만 "난 독일 사람이 아니라 바이에른 사람이다"고 말하는 뮌헨 서포터들이 대표팀을 조롱하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한국 대표팀과 부천FC가 경기를 한다면? 당연히 부천FC 골대 뒤로 갈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대표팀 경기에 관심이 크고, 여러 장면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코끝이 찡해지기도 합니다. 지면 화도 납니다. 민족이라는 동질감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닉 혼비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나는 잉글랜드가 이기기를 바라긴 했지만,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