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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football itself

프로축구와 모기업 홍보의 잘못된 만남

by walk around 2009. 8. 21.

한국축구, 변해야 한다 ③

몇일전 "한국 축구, 변해야 한다"는 제법 거창한 부제로 첫 포스팅을 하면서 우리 프로축구 구단의 경제적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프로축구와 모기업 홍보의 공멸 시나리오는 다음에 이야기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기억하는 분은 없겠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문제를 짚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프로축구 구단을 만든 대기업들이 프로축구를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해당 기업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프로축구 리그를 출범시킨다는 정부의 뜻에 호응한 측면이 있었으니까요.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던 당시 스포츠구단은 기업이 사회환원 차원 또는 홍보차원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수익사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안타깝게도 한국프로 축구의 지지부진한 발전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8월자 삼성 기업집단 소속 기업들의 명단입니다.
파란색 '삼성전자축구단(주)'로 되어 있는 것이 수원블루윙즈의 정식 법인명입니다.


구단이 수익을 염두에 두지 않으니 마케팅은 10년 후배 J리그에 크게 미치지 못할 정도로 발전이 더뎠습니다. 스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텅빈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한 구단이 "구단을 매각한다"는 발표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심지어 "홍보를 위해서 만든 축구단이 경기에서 상대를 이기면 오히려 모기업에 대한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생긴다"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대기업이 만든 구단의 직원 중에는 엘리트들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 공채로 선발되어 보직을 축구단으로 받은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이런 분들이 구단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방법을 모를리 없었습니다.

신문에서도 많은 기사들이 나오고, 팬들도 게시판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많이 올렸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단들은 제대로 마케팅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출혈로 돌아올 공짜표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전국의 구장에서 프로축구경기를 관전했는데, 표를 사지 않고 들어갈 기회가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90년대 후반, 2000년 초반에는 공짜표는 일부 구단에서 '살포' 수준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대기업 계열 한 구단 직원께서 몇년 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자체적으로 흑자를 내면, 그 이후에는 모기업의 지원을 받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예산이라는 게 좀 그렇습니다. 예산을 남기면 다음 해에는 예산이 줄어듭니다. 예산을 배정하는 쪽에서 "지난해에 남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자회사나 사업부가 해당 파트에서 흑자를 내면 "그거 돈이 되는구나! 이제 독립채산제를 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구단 입장에서 '독립채산제'라는 말은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을 시작하라는 준엄한 명령이 됩니다.

제가 구단직원이라도 험한 경쟁에 내몰리느니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모기업이 운영자금을 대주는 편을 택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우리 프로축구발전을 더디게 한 여러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8월자 지에스 기업집단 소속 기업들의 명단입니다.
(주)지에스스포츠가 FC서울의 법인명입니다.

올해 AFC의 압력아닌 압력에 따라 대기업 산하 구단들이 속속 주식회사 등의 형태로 독립법인화하고 있습니다. 당장 모기업이 돈줄을 끊지는 않겠지만, 예전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법인간 자금이동은 그냥 자동이체하는 것 이상의 정당한 거래명분이 있어야 법적인 요건을 갖추게 됩니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구단을 뭔가 해야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수원블루윙즈의 법인명은 '삼성전자축구단(주)'입니다. FC서울의 법인명은 (주)지에스스포츠입니다. 지역연고를 바라는 팬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 있는 법인 이름입니다. 하지만 현재 규모로는 자체 생존이 어려운 구단과 이를 이해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모기업이 구단을 배려한다"는 일종의 보험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아무튼 '프로축구와 모기업 홍보의 공멸 시나리오'는 모기업의 우산 밑에 안주하려는 구단의 소극적인 운영이 계속되면 결국 리그의 긴박감이 반감되고 구단도 어려움에 빠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대기업 산하구단의 잇딴 법인화로 '홍보도구'였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결국 생존을 위한 마케팅이나 자체 구조조정을 하는 단계가 되었지만 아직은 조금 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에스스포츠는 LG스포츠에서 분화되어 나왔습니다. 프로팀 중 법인화를 꽤 이르게 자체적으로 한 셈입니다. 이 덕분인지 몰라도 연고이전 논란은 일단 차치하고 마케팅이나 선수거래(?), 관중집계 등 여러 측면에서 다소 앞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축구, 변해야 한다 ①
한국축구, 변해야 한다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