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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living

오늘 아침, 길 물어보시던 할머니

by walk around 2010. 3. 16.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오늘 아침 출근길. 시간 여유도 있었고 급한 일도 없는데 지하철에서 내려서 필사적으로 사무실을 향해 걸었습니다. 누가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숨가쁘게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 눈 앞에 한 할머니가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할머니는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저기…. 말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흔은 되셨을 것 같은 할머니의 깎듯한 존대말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어쨌든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숨 돌리시더니 "3호선으로 갈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역은 정말 복잡한 곳입니다. 9호선, 7호선, 3호선이 얽혀 있습니다. 출구 잘못 나가면 30분 이상 헤메는 것은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서초동 쪽 가톨릭병원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이 신세계백화점 앞쪽으로 나가면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일단 저 에스컬레이터를 타시고 다 올라가신 후에 왼쪽으로 가세요."

할머니는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로 고마워하셨습니다. 아마도 사무실로 빠른 속도로 끌려가는 인파 속에서 말을 걸 사람을 찾지 못해 한참 서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제대로 가는지 보려고 뒤를 따라갔습니다. 허리를 굽었고 야윈 편이셨습니다. 머리는 예의 뽀글뽀글 파마입니다. 걷는 것 자체가 힘겨워 보였습니다. 옷은 예전부터 자주 보면 전형적인 할머니 옷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하신 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엉뚱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시길래, 뒤에서 붙잡아서 다시 길을 바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예측과 다른 방향을 알려 드리니까 오히려 불안하셨던 모양입니다. 할머니 어깨를 잡을 때 순간적으로 "아, 약하다"는 느낌이 확 올 정도로 힘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일원역으로 가야 합니다."

다시 깎듯한 존대말을 하셨습니다. "네. 이쪽이 맞아요." 다시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맞는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까지 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계단을 내려가시며 연신 "고맙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침부터 그냥 기분이 좀 그랬습니다. 저 할머니는 평생 여행을 몇번이나 가셨을까. 입고 싶은 옷은 얼마나 입어보셨을까. 하고싶은 공부는 얼마나 하셨을까. 결혼 이후 친구들과 마음 편하게 놀아본 적인 있으실까. 아까 그 자리에는 얼마나 서 있었을까. 사람들은 몇 명이나 그냥 스쳐갔을까. 가시려는 종착지는 어디일까.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헷갈리지 않을까. 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 고마워할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에게 간만에 따뜻한 경험을 해주신 할머니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T.T

...

오늘 아침에 만난 할머니보다는 어리시지만 우리 어머니도 비슷한 인생을 사시지 않았을까. 요즘 지난 세월이 억울하신 듯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공연도 보고, 사고 싶은 것도 사면서 지내십니다.

일 하다 "무슨 공연하는데 앞자리 예매해달라", "제주도 놀러 갈껀데 10만원 보태라" 전화 받으면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건 짜증을 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할머니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우리 어머니라도 말년에 즐겁게 지내실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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