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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부천 story41

부천FC 1995, 드디어 희망을 담은 창단 설명회 2007년 10월 10일 부천종합운동장. 1년 이상 준비한 구단 창단현황을 팬에게 설명하는 '창단설명회'를 개최했다. 축구기자들과 지역기자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지역 인사들도 대거 초대했다. 행사 당일. 행사장은 팬들로 가득찼다. 부천SK의 연고이전 이후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팬, 특히 서포터는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위기였다. 창단설명회는 희망으로 가득차있었다. 준비하는 사람도 팬도 모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창단TF는 빨리 설명을 하고, 팬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창단설명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 명패가 있는 분들은 창단시민모임 간부들이다. 창단 작업 중 이렇게 지역인사들을 동참토록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후 이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많은 협조를 해주었다. 우측 붉은 옷.. 2012. 1. 15.
창단 앞둔 부천FC, 코칭스탭과 선수단 구성하고 창단설명회 준비하다 연고지 협약, 최소한의 후원사 확보 등이 진행되면서 감독 선임과 선수단 구성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팀을 만들어 가는 주체가 팬 집단이었기 때문에 경기인 출신 감독을 선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됐다. 하지만 지역의 축구인과 생활체육인들의 소개로 부명정보고등학교 곽창규 감독을 알게되었고 선임되었다. 곽창규 감독에 대한 느낌과 공적은 아래 포스팅에 비료적 자세히 설명을 했다. 코치로는 박영수 코치가 선임됐다. 부천FC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박영수 코치에 대해서도 이 블로그에서 조만간 이야기를 할 기회가 올 것 같다. 링크 : 부천FC 1995 초대감독 곽창규 그사이 단 한명 뽑기로 한 직원도 뽑았다. 당시 뽑힌 직원은 호주 유학 중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고는, 급기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2012. 1. 13.
다음커뮤니케이션, 석수앤퓨리스, 예손병원… 잇따른 마케팅 협약 2007년 후반. 부천FC 창단 작업이 탄력을 받고, 스폰서도 확보되는 가운데 다음커뮤니케이션과의 마케팅 협약도 체결되었다. 당시에는 현금이 오가는 협약은 아니었지만 DAUM이라는 국내 최고의 플랫폼을 통해 부천FC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특히 DAUM은 로고가 예쁘기 때문에 유니폼 디자인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유니폼 디자인 과정에서 구단의 디자인 부문 자원봉사자들은 DAUM 로고를 유니폼 메인에 넣고 싶어했다. 후원금액으로 치면 당연히 SK에너지가 유니폼 메인에 가야했다. 위 사진은 부천FC 서포터즈클럽 헤르메스(bucheonfc.net) 게시판의 게시물 일부 캡쳐입니다. 후원사인 석수앤퓨리스에 감사하며 "우리 사무실에서는 석수만 마신다"는.. 2012. 1. 13.
스포츠토토, SK에너지에 이어 용품후원사 키카 선정 2007년 부천FC 1995 창단 작업 당시 키카(KIKA)는 부천FC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는 회사였고 업계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우선 키카는 부천FC 유니폼 디자인을 구단에 맡겼다. K리그라면 모를까, K3 구단이 직접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이를 업체가 생산해 주는 구도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카는 이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권장했다. 이 작업에는 부천FC의 당시 디자인 팀장 김준형님과 서유유나이티드의 당시 장부다 이사님이 동참했고, 장부다님은 유니폼 바탕에 부천과 구단을 상징하는 '복숭아', '1995' 문양을 희미하게 담을 것을 제안하였고, 구단은 좋은 아이디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김준형 팀장도 열정을 보태서 유니폼이 완성됐다. 나중 이야기지만,.. 2011. 12. 14.
부천FC 서포터 헤르메스 "3부리그면 어떠냐. 우리팀이면 된다" 부천FC 1995 창단 작업을 진행하면서 막판에 창단TF에게 부담이 된 것은 "팬들이 내셔널리그(2부)도 아닌 3부리그 팀을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었다. 팀이 없다보니 3부리그 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팀이 만들어 지면 그 초라함에 다시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제 원정을 가도 상대는 서포터가 없을 것이고,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경기는 있을 수 없었다. 경기 중에 트랙에는 주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을 수 있고, 천연잔디가 아닌 인조잔디 구장에서 경기를 할 수도 있고, 관중석조차 없을 수 있다. 이 때문에 K리그를 호령하던 부천FC의 서포터들이 경기장에 와서 "고작 이딴 구단을 만드었다말이냐"며 실망할까 걱정이었다. 더 팀 창단을 진행하기 전에 K3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리는 글을 정리.. 2011. 12. 4.
2007년 2월, 팀 창단 작업 진행 중 서포터와 대화 부천FC 1995 창단 작업을 자료와 기록으로 정리하며 지금까지 대행사 선정과정에서의 좌절 내지는 아픔과 지자체와의 엇박자 등을 다루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리를 하다보니 한참 진도를 나가다가 "앗! 그 이야기를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도 2007년 11월 1일 부천시와의 연고지 협약식까지 진도가 나가고 보니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 중 빠뜨린 것이 좀 있다. 여기서 잠시 시계를 2007년 2월로 돌려서 몇 가지 이야기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점에는 축구단 창단을 위한 시민모임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가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시의 각종 단체를 하나로 엮어내는 시점이었고, 그것이 의외로 매우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당시, 2007년 2월 27일 부천서포터 헤르메스 게.. 2011. 12. 4.
어렵게 성사시킨 부천FC - 부천시의 연고지 협약 팀을 창단하고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준비되고, 팀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면서 이제 현안인 부천시와의 연고지 협약을 위한 노력을 했다. 시 측은 연고지 협약 자체를 거부했다. "연고지 협약을 하기 위해서는 구단이 대표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시민구단이 지역을 대표한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연고지 협약 이후 팀이 운영되다가 운영자금이 바닥나면 시가 이를 보전해 주어야하는 것인가" 이렇게 두 가지가 주된 거부 이유였다. 첫번째 문제제기는 매우 절절하지만, 이미 부천시 축구협회를 비롯한 관내 많은 단체들이 참여를 하고 있고, 여야 정치인이 모두 참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답변이 비교적 간단했다. 문제는 두번째 문제제기였다. 이 때문에 시에 대한 제안서를 또 준비했다. 제안서에는 팀의 운영방안이.. 2011. 11. 30.
창단 대행사 선정 결국 실패, 남은 것은 팬이 직접 창단 기대가 컷다. 이번에 접근한 업체는 그래도 한국 스포츠마케팅 업체 중에는 베스트급에 속하는 곳이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 설립 때 우연찮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업체도 심사숙고 끝에 참여가 어렵다고 최종 통보를 했다. 결정을 알리는 과정이 너무나 젠틀해서 불만을 가질 수도 없었다. 다만 너무나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 정말 직접 팬이 구단을 창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가진 것을 점검했다. 일단 시청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해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지역사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부분 이름을 걸었다. 그러나 스킨십은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관내 정치인들은 관심은 있으나 적극성은 떨어졌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힘은 주었다... 2011. 11. 28.
첫번째 후원사 확정 그리고 다시 창단업체 찾기 창단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여야가 모두 힘을 합친 모양새였고, 부천시축구협회 등 여러 단체들이 이름을 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과 단체를 엮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역사회를 엮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을 만났고, 이광열님 등 서포터 내 연장자(?)들의 인적 네트워크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뜻으로 힘을 합친 셈이다. 2007년 6월경이었다.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한 부천FC 창단TF는 먼저 창단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배기선 의원 등의 노력으로 먼저 스포츠토토의 후원이 약정됐다. 첫번째 후원 약정이었다. 엄청난 진정이었다. 곧이어 SK에너지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의 대화도 시작됐다. 뭐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TF의.. 2011. 11. 27.
부천시에 도대체 왜 축구단이 있어야 하는가? 2 이전글 : 부천시에 도대체 왜 축구단이 있어야 하는가? 1 세번째로 제시한 이유는 부천종합운동장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운동장은 무려 1천200억원이 투여된 대형 구조물이다. 축구단이 없을 경우, 이 운동장의 활용도는 아무래도 떨어지게 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가 훈련 베이스로 삼았던 부천종합운동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잔디와 종합운동장이면서도 비교적 그라운드와 관중석이 가까워 다이나믹한 관전이 가능하다. "축구는 문화 컨텐츠의 보고입니다. 문화의 도시를 추구하는 부천시가 절대 놓칠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이것이 네번째 이유였다. 이 내용은 아래 당시 준비했던 PT 자료의 한 페이지로 갈음한다. 그리고 최근 부천FC를 주제로한 만화가 인터넷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축구가 콘텐츠의.. 2011. 11. 25.
부천시에 도대체 왜 축구단이 있어야 하는가? 1 배기선 의원 앞에서 주어진 5분 동안, 부천에 왜 축구단이 있어야 하는지 5가지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논리 중 일부는 다른 도시에 적용이 가능하다. "첫번째. 축구단이 사리진 후 미디어에 부천의 노출 빈도가 급속히 낮아졌습니다. 도시 인지도 제고차원에서 축구단이 필요합니다." 실제 그랬다. 부천SK가 있던 시절에는 관련 기사가 많았다. 수원, 성남, 부천은 축구단이 있는 수도권 도시였다. 안양, 고양, 의정부 등과 비교해 보면 느낌이 온다. 당시 TF는 축구단이 없던 시절과 있던 시절의 '부천시' 관련 기사 수를 세었다. 거의 2배, 3배 차이가 났다(사진 참고). 노출은 인지도와 연결이 된다. 대중은 인지도가 높은 곳에 여행을 하고, 이주를 고려한다. 지금 이야기 중인 미팅이 끝나고.. 2011. 11. 23.
K3팀 창단으로 방향 전환 그리고 배기선 의원과 만남 대행사에 의한 창단과 유명인과 함께 한 창단이 차례로 무산된 후 창단TF는 한달 정도 패닉에 빠졌다. 다시 의욕을 불러일으킨 일은 아마도 5월 경에 일어났다. 당시 개인적으로 대한축구협회의 '주니어보드'라는 조직에서 한국축구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주니어보드에는 서형욱 해설위원을 비롯한 언론인, 당시 FC서울과 인천 유나이티드의 마케팅 담당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동렬 붉은악마 전 부회장 그리고 나와 같은 팬들도 서너명 있었다. 이 모임을 담당하던 축구협회 직원 신만길씨는 AFC로 파견을 가게되었고, 김종윤씨가 담당을 하게되었다. 정기모임이 끝나고 간단한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김종윤씨가 "K3 구단은 1년에 3억원 정도면 운영이 가능하다. 현재 창단하는 구단이 많다... 2011.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