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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부천 story

느닷없는 전화…"시간 있어요?"

by walk around 2009. 9. 13.

2006년 2월 2일 목요일 오전 9시 30분경.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낯익은 전화번호 였다.

"부천SK구단 A입니다."

의외였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한참 바쁠 텐데, 왜 전화를 했을까.

"지금 시간 되세요? 사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사무실로? 순간 구단에서 일개 팬에 불과한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직접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나하는 우쭐함이 스쳤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종로에서 과천까지 온단 말인가.

"무슨 일이신데요?"

"가서 말할게요."

"아이 참, 오시는 동안 궁금해서 죽어요. 이야기해 보세요."

"연고 문제예요?"

"연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연고문제'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도 당시에는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부천SK 구단의 몇몇 관계자들은 예전부터 "부천이 인구가 적어서 시장성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기업에서 흔히 생각하는 시장 논리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 부산 등 큰 도시가 얼마든지 있는지 하필 서울과 인천 사이의 부천이라니…. 그렇다고 팀 운영비가 대도시팀에 비해 적은 것도 아니다. 이래저래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구단 관계자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부천 서포터는 "일본의 인기구단 우라와레즈의 연고지 우라와시는 인구가 50만명이다", "유럽 빅클럽이 있는 도시 중 인구 100만 이하가 수루룩하다. 80만에 달하는 부천시의 인구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부천FC를 브랜드로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 등이 이야기를 했다. 해마다 구단 발전을 위한 의견을 구단에 제출하기도 했다.

구단 측에서는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급기야 개인적으로 "차라리 팀 이름을 '웨스트리버 F.C.(West River F. C.)'로 바꾸고, 제 2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양천구 목동부터 강서구, 부천, 부천과 같은 생활권인 인천 부평, 김포, 시흥까지 아우르는 컨셉으로 가자"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 구단 관계자의 "연고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는 말을 듣고, 구단의 고민에 대해 성심성의껏 이야기를 해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으로 필요한 자료 검색도 하고, '웨스트리버 F.C.'라는 컨셉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을 수 없을까라는 고민도 했다.

'연고문제'가 '연고이전 문제'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몇일전 구단 관계자가 서포터 여럿을 모아두고 "올해부터 잘해보겠다"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가진 뒤였기 때문이다. 팬들도 한껏 기대에 찬 상태에서 시즌을 준비 중이었다. 2004년 부임해 날이갈수록 팀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 정해성 감독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10시가 좀 넘자, 한 축구 전문언론사에서 근무하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SK가 연고이전을 한다면서요?"

"무슨 소리야?"

"SK가 제주로 간대요."

"…"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붉은악마 행정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SK가 제주가요?"

"몰라. 확인 중이야."

그러는 사이 구단 관계자가 도착했다. 먼저 사실 확인부터 했다.

"정말이예요?"

"네."

의외로 쉽게 확인이 끝났다. 긴장했던 것이 비하면 싱거운 대답이었다.

"결정 난 거네요?"

"그렇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번복될 가능성은 없는 거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근데 왜 오셨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인연인데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 환경이 눈물이 나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갑자기 너무 강한 울음이 솟구쳐서 내 몸으로는 한번에 토해낼 수 없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맥이 풀리는 게 배가 푹 까지면서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한 구단 관계자가 나를 안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자비를 들여서라도…"

자비를 들여서 부천에 팀을 만들겠디는 건지, 나를 제주로 매주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구단 관계자가 이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또다른 부천 서포터가 왔다. 이 친구도 간단하게 확인하더니 그대로 주저 앉았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더 이야기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가세요"라고 말했다.

"부천 서포터가 제주 경기를 보러올 때 비행기표와 숙소를 제공하겠습니다. 제주로 떠나도 성원해 주세요."

"그게 말이 되요? 어서 가세요."

담배를 잇따라 피우고 겨우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무엇보다 내가 종교처럼 생각했던 축구팀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10년간의 추억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번에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부천구단에 줬다. 한번에 빼오기에는 너무 많이 줬다.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