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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부천 story

"누가, 왜 이런 결정을…"

by walk around 2009. 9. 13.

내 모습이 심각해 보였는지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머릿 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귓가에는 부천 응원가가 떠나지 않았다. '정신적 공황상태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인터넷으로 부천SK라는 축구팀과 함께 한 추억을 찾아 헤맸다. 열정적인 부천 서포터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진 또는 동영상을 하나씩 찾아 볼 때마다 "맞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중얼거렸다.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30대 중반 남자가 사무실에서 멍 하니 앉아 있다가 주루룩 눈물을 흘리는 꼴이라니….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좀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휴대폰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제 어떻해야 하나"라는 막막한 소리이거나 갑자기 연고이전을 감행한 SK에 대한 비난의 소리였다. 그런 이야기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날 저녁 부천SK를 좋아했던 친구들이 부천종합운동장 내에 있는 서포터 응원물품 창고에 모였다. 한 50명 정도 모인 것 같다. 모이긴 했지만 사실 대책은 없었다. 다시 SK구단을 불러올 수도 없고, 온다고해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팀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냥 말 그대로 팀을 잃어버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던 구단이 멀리 떠났어도 그 팀을 계속 응원하든지 아니면 수도권의 다른 팀을 응원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실제로 SK구단이 떠난 후 일부 서포터들이 수원삼성 서포터로 옷을 갈아 입거나, 인근 인천 유나이티드 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서포터는 자신이 처음 지지를 선언한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서포터 세계의 룰이고 일종의 원칙이다.
언젠가 다른 칼럼에서 자세하게 기술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서포터는 자신의 고향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사람이 고향을 바꿀 수 없듯, 서포터도 자신이 응원하던 팀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긴 이런 문화는 서포터 문화가 창궐한 남미나 유럽의 상황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의 진짜 고향 또는 삶의 터전에 뒤늦게 팀이 생기면 응원하는 팀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응원하는 팀의 서포터 집단이 자신을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때에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서포터는 반드시 한 팀을 응원해야한다는 원칙을 들이대서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이 영원히 대놓고 좋아할 팀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아무튼 당시 부천SK를 응원했던 사람들 상당수는 부천을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창고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럽게 "누가 왜 연고이전이라는 결정을 내렸는가"로 이어졌다. 절망에 가까운 분노를 풀어낼 대상을 찾는 대화가 시작된 셈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연고이전 발표 후 바로 그날 저녁 부천종합운동장의 서포터즈 창고에 모인 사람들. 지금 시간이 흘러 다시 얼굴들을 보니 모두 훗날 부천FC 1995의 창단의 주역들이다. 물론 사진에 못담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지만..

이 사진을 찍을 때 내 느낌은 장례식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훗날 웃으며 이 사진을 볼 시간이 오기를 바랬다. 아직은 웃고만은 볼 수 없는 사진이긴하다.